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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작동縐嘗作動 -민병직(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어떤 변화? 온전한 작가라면 작업은 좋든 나쁘든 긍정적인 벡터로 변하기 마련이겠지만, 정직성 작가의 최근 횡보는 왠지 남다른 기운들로 다가온다. 표면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화풍의 변화는 물론 잔잔한 폭풍처럼, 심상치 않은 가속도마저 감지되니 말이다. 근작들에서 작가의 화명(畵名)만큼이나 일견, 질서정연하고 바른 화풍을 뒤로 한 채 어떤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느껴지는 것이다. 과감하고 힘 있는 붓놀림에서 자유로움이 묻어나오는가 하면 이전의 단조로운 색감은 훨씬 다채로워져서 심경의 변화마저 추측하게 한다. 훨씬 더 유연해지고 여유로워진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 그 기운에서 전해져오는 의뭉스러움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전체적으로 긍정적이고 유연한 사유와 에너지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복잡해진 내밀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유연하고 호방한 화풍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만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화면에서 전해오는 시원한 붓 터치가 활력 넘치는 움직임을 빚어내고 있지만 유동하는 저 형상들이 왠지 남다르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과연 무언가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그저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작가 역시 한층 여유 있어지고 완숙해진 것뿐이었을까. 하지만 성급히 말하건대, 절점의 변화는 분명 있어, 이전과의 분명한 단절이되 연속적인 면도 있어 결과적으로 지속의 궤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마치 작가가 최근 그리려 하는 기계의 작동처럼, 그 모두는 한 움직임으로 통합될 터이니 말이다. 기억하기에 정직성 작가의 작업은 무척이나 의식적이고 개념적인, 그러나 회화였다. 작가의 작업은 지금, 여기를 둘러싼 경직된 사회의 구조들에 대한 회화적인 항변이었고, 서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과정에 사회를 둘러싼 온갖 현실적인 것들, 때로는 개념적인 것들과 동시대 담론들이 녹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지난한 삶의 궤적들 또한 담아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지만. 여하튼, 못난 사회적 현실을 둘러싼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현실 공간의 불편부당함에 대한 분명한 독법(讀法)과 문제설정(problematic)의 시선이었던 것 같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이를테면 ‘전략으로서의 개념적인 회화’라 할 만한 것들을 펼쳐냈다. 옳지 못한 세상에 대한 일정한 비판의 시선들과 사유를 드리우는 작업들이라 할 수 있는데, 대체로 현실인식의 긴장감 있는 끈들을 놓지 않으려 하는 맥락과 함께였다. 이 과정에서 인식론적 그물망들이라 할 수 있는 여러 동시대 이론들의 흔적들이 보이긴 하지만, 이조차도 현실의 복잡다단함과 그 미세한 결들을 붙잡기 위한 방편으로서 자리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미 주어진 것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세상을 보려하고, 다가서려는 것이다. 아니 다르게 감각하려 했던 것이라 해두자. 작가가 시선을 향하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 우리를 둘러싼 현실 공간이다. 작가는 균질하고 추상적인 공간성 대신 체험으로서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장소성, 혹은 반장소성의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면에서 정태적인 공간의 논리를 횡단하는 시간성의 전략을 천착한 회화를 지속해온 것이다. 이는 우리를 그럴듯한 환영으로 짓누르고 있는 저 요란한 자본주의의 스펙타클 한 공간 이미지를 재독해하고, 작가의 말처럼 도시공간의 내적복합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와 연동된 구체적인 삶의 질감과 차이 있는 세부에 대한 강조는 이를 회화적 버전으로 실현해야 하는 작가에게 있어 적절하고 유효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내용상으로 보자면 지극히 개념적이고 담론적인 독법이지만 작가의 실천은 구체적이었고 감각적이었다. 한편에서는 도시주의 심리학적 실천으로 현실적 효과를 발휘하는 모그룹의 일원으로서,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실천과 연동된 화가로서의 삶이 결합된 것이었는데, 작가의 회화적 실천은 이러한 맥락에 더해 개인의 내밀화된 감각상의 선호도 한몫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천(賤)하나 아름다운 자본의 공간화에 반(反)하는 작가의 선택은 걷기와 같은 신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었지만 무의지적인 감각작용이나 무관심적인 태도에 의해 우연히 조응하는 것들, 도시화의 틈새나 이면의 공간에 대한 발견들로 이어졌다. 개념적인 시선이었지만 그 시선으로 작가가 포착하려 한 것은 한 하늘아래 잡다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이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살가운 것들, 정감 있는 것들, 자생적인 차이의 감각들로 향한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들 현실의 구조화된 틈새에 자리하는 예기치 않은 상황들, 우연성, 의외성, 아이러니, 돌발성 같은 변수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감각하고 이를 화폭에 담아내려 했었다. 하지만 이를 다시 구조화시키려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물론 이때의 구조는 현실의 구조와는 다를 것이다. 정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는 이를 ‘무정형 구축’이라 개념화시키려 했고, 이를 스스로 자라나는 생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긍정의 플로를 드러내려 했다. 결국 작가의 그림은 이러한 구조의 감각을 복원하여 살아있는 형상들을 재구축하는 것이 된다. 단순한 안티 항으로서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려는 적극적인 생산적인 기운을 긍정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현실의 구조화된 틈새에 자리하여, 그 너머의 존재들을 말하는 바깥의 사유라 할 만한 것들이다. 다시 말해 정태적이지 않은 생성과 변화의 흐름을 붙잡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의외성, 예기치 않은 순간들을 담아내기 위해 작가는 때로는 무의식적이고 자동기술적인 방법론 같은 것들을 차용하는데, 이는 구조화된 언어 너머의 회화적인 몸짓이며 감각의 복원과 형상(figure)혹은 형상적인 것(the figurative) 대한 천착이라 할 수 있다. 구조의 이면에 자리하는 보이지 않은 것들, 그 잠재적인 변화와 생성의 힘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런 현실의 미묘한 상황과 변수들에 대한 사유를 작가로서 감각적인 방식으로 펼쳐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다하지만 작가가 부여잡은 구조화의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또 다른) 질서의 논리일수도 있다. 이를테면 구조화의 역설이라 할 만한 것들인데, 이런 점들이 작가에게 결국은 또 다른 강박으로 작용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래서 만약 작가의 작업에 변화가 있었다면 이러한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 다시 말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질서의 논리로 포섭시키고, 이를 화폭에 담아내야 하는 그 부담감으로부터 탈피하려 한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를 우선 방법론상에 있어서의 차이라고 해두고 논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자. 추상작동縐嘗作動 사회 내에서 보이는 것들, 혹은 보여 지는 것들은 이미 정태적으로 구조화된 것들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 온갖 권력의 힘마저 작동하니, 이에 대해 편치 않은 심정을 가진 작가로서는 이들 구조화된 현실의 이미지로부터의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방편 중의 하나가 추상의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 비루하고 몹쓸 현실로부터 가감 없이 덜어내는 그 행위만으로도 작가가 고민했음 직한 심경이 십분 이해되지만, 단순히 회피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 지기에 작가가 구상하는 추상의 전략에 대해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전 작업들에도 추상적 요소는 있었지만, 2008년도 김진혜 갤러리에서의 <기계>전을 전후로 해서 추상이 더 적극적인 동인(動因)들로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전시에서도 기묘한 한국의 공간 형태라 할 수 있는 연립주택의 반복성 속에서 미세한 차이와 자율적 생산구조를 드러내려 한 시도는 여전하지만, 현실 공간에서 채집한 요소들을 재조립하고자 했던 방법론, 곧 그림이 가지고 있는 내적 구축의 논리 자체를 더 부각시켰다. 추상적 요소의 강조도 이와 연동된다. 이들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방향으로 이어지는 연결 공간들, 이를테면 계단이 난간이 되고 난간이 다시 벽이 되며 건물의 몸체가 다시 계단이 되고 천정이 되는 식의, 화폭에 시간의 흐름을 지속시킨 무정형 구축의 논리들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접근의 틀이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구조화의 구조화라 할 수 있는 이전의 논리 대신 기계 개념을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기계는 구조와 다를 뿐만 아니라 구조가 가진 정태적인 것들을 절단하고 가로지르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구조적으로 수립된 사물의 질서에 대한 절단의 체계인 것이다. 기계의 작동은 무작위적이고 잠정적인 것으로, 절단이 되었다가 다시 봉합되고 이어지면서 이질적인 요소의 체계, 다시 말해 변화와 생성의 힘으로 횡단하는, 현실의 심층적이고 복잡한 (비)체계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구조화의 역설을 넘어서는 논리인 셈이다. 동시에 힘의 흐름에 수반되는 무의식과 욕망의 논리마저 담아낸다. 삶의 우연성을 드러내는 자동기술적인 방법론과 만나는 것도 이런 지점에서인데, 기계의 작동이 무의지적이고 우연한 변수를 긍정하고. 그러한 기계적 움직임의 반복이 또 다른 차이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계의 작동 원리는 신체로 경험한 요소들을 재조립하고 이들 감각을 형상화시키려 했던 작가의 작업을 다른 식으로 도해할 수 있는 방법 틀이며, 앞서 말한 구조화의 역설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훨씬 더 유연하고, 역동적인, 그러면서도 그림의 내적인 작동 방식을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기계>전 이후 작가는 <작동>, <가로지르고 멈춘다>, <흐르는 기계>전 등으로 계열화 된 전시를 이어 나간다. 대신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더 추상적인 것으로 선회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터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작동이라 할 수 있는 동적이고 유기적인 흐름에 더 강조점을 둔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불가항력적인 구조나 힘에 대한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이나 이와 연동되는 자연발생적인 생장에 대한 관심은 이전부터 있었다고 본다면 작가의 변화란 단지 외적인 그림의 양상에서의 변화이거나, 그 부각 지점의 이동 정도로도 설명할 수 있다. 유동적인 흐름에 대한 선호는 이전 작업들에서도 충분히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미세한 변화의 양상이나 강조점의 이동은 그림에서 크게 드러나는 법이다. 근작들에 있어 즉흥적인 공간구축은 여전하지만, 이를 외화 시키는 방식에 있어 가감(加減)의 폭이 커졌고, 빈 공간들을 포함하여 자유롭고 여유로워진 화면 구사에서 작품 혹은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 있어 어떤 근본적인 변화들이 감지된다. 예를 들어 화면의 움직임과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는데, 선, 형태, 색채 등의 사용이 과감해졌음은 물론, 서로간의 경계를 넘어 상관하고 침투하는 방식에서 한결 편해지고 유연한 느낌들이 전해진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자국들이나 선들도 그대로 둘 정도로 말이다. 이는 작가의 말처럼 ‘삶의 불확정성을 화면에 받아들일 때가 된’ 것이라 판단하고 무언가를 정리하는 강박을 벗어나 작가가 느끼는 그 자체를 좀 더 자유롭게 구현하려 했기 때문인 듯싶다. 그런데, 단지 화면상의 변화뿐이었을까? 혹 세상과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져서 그리고 좀 더 원숙해졌기에, 이제는 그 앞에 놓인 것들을 온전히 품어내어 이를 향유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추상미술은 어떤 면에서는 작가의 내적 복합성이 표현된 미술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미세한 감각들과 삶에 대한 태도들이 묻어 나오는 추상 미술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가는 이러한 반복적인 그리기의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차이의 감각을 생성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어떤 상황마저 흔적처럼 드러내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되물어보게 된다. “그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은 그림이 나에게 나를 가리키며, 어떤 분열도 어떤 강요된 의미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나 스스로 의미로서의 나를 구성하라고 요구한다.” (피에르 술라주, 이미지와 의미, 정의진, 추상미술의 언어적 스테이트먼트의 어떤 필연성-피에르 술라주의 시적 회화론을 첨부하며, 인문예술잡지 F 2호, 문지문화원 사이, 2011 中에서) 세상의 예기치 않은 변수들과 예외적인 상황들을 기꺼이 보려 한 것이 결국 그러한 세상과 결부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과도 중첩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작가의 추상은 현실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고 그림인 동시에 삶에 대한 자신의 감각들과 태도마저 드러내는 궤적이고 흔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일종의 다이어그램(diagram)인 셈이다. 다이어그램은 현실의 힘들의 흐름을 도해하는 방식인데, 거시적인 구조의 방식이 아니라 무한히 작은 관계들, 감각적인 차이를 가시화시키면서 힘들의 역동적인 흐름, 곧 그 균열과 단절을 포함하여 유동적인 변이와 생성의 흐름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어그램은 이미 다양한 층위로 고착하여 일관된 힘의 논리를 강요하는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이를 넘어서려는 비판과 생성의 시선의 흔적들을 담아낼 수 있게 된다. 불균형적이고 열린 체계이기 때문이다. 변이와 생성의 흐름에 놓인 것은 비단 현실의 세상만은 아니기에, 이는 작가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게 보자면 근작들에서 보여 지는 변화는,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세상과 작가 자신(의 감각)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일치시키는 과정으로 읽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삶의 그 생생하고 구체적인 것들을 붙잡으려는 애씀 말이다. 어떤 고정된 의미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이를 발견하고 포착하며 개방하려는 시도라는 면에서, 작가의 최근의 달라진 것 같은 횡보는 변화이기에 앞서 지속이고 연속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추상은 그런 면에서 현실은 물론 그와 결부되어 있는 자신의 감각상태마저 드러낼 수 있었던 효과적인 방법론이었다는 생각인데, 이를 추상작동(縐嘗作動)이라 칭해보는 것은 어떨까. 현실의 세부를 주름지게 하고(주름질 추縐), 이를 다시 시험하고 체험케 하여 맛을 음미하는(맛볼 상嘗) 그런 작동 말이다. 무한한 펼침과 접힘을 반목하는 주름작용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관계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인 동시에 그와 연동된 탈중심화 된 주체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작용 속에서 미학적 에토스를 가진 주체 형성 또한 가능해진다. 다면적인 감각으로 세상을 대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원적인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저 유동하는 액체의 흐름처럼 우연하고 유유히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진중한 인식과 비판 대신 온전치 못하고 비루한 세상마저도 온몸으로 받아들여 이를 즐거운 유희와 저항으로 변환시키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동양화의 그것처럼 작가는 이를 그림 그리기의 과정을 통해 때로는 비워내고, 때로는 색과 형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어떤 질서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태도로 재무장하여 살아있는 현실 공간을 그림으로 다시 조립, 구축해간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여전히 그림 그리기는 작가에게 ‘상황을 능동적으로 넘어서는 확대된 자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작가와) 작가의 그림은 自然처럼, 더 완숙하고 너른 영역을 향해 스스로 그림이 되어간다. English 정직성의 ‘구조주의 미학’ 이후 김종길 | 미술평론가 경험적 실체 배후의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구조의 발견이야말로 구조주의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 구조주의사회학의 개념에서 하나의 전제 이 글에서 말하는 ‘구조주의’는 두 가지의 의미에서의 구조주의다. 첫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950년대에 형성된 사상적 조류다. 둘째, 정직성 회화의 시각적 현존태를 표현하는 언어다. 정직성의 회화는 구조적이다. 그의 구조적 회화는 ‘집(세계, 사물, 물체…)’와 ‘사람(의식, 영혼, 마음…)’을 구분하지 않는다. 구조회화의 세계가 하나의 사회이고 국가이며 전체라는 뜻이다. 그는 구조회화를 통해 자본주의 한국사회의 단면을 성찰해 왔다. 집의 구조와 그 항들 사이의 관계에서 그는 삶의 실재성을 의문했던 것이다. 이러한 회화적 화두는 어떤 대상이 의미를 자신의 내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에 의해 구성되는 대상들의 관계와 구조들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구조주의 기본개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정직성의 회화적 구조주의는 사상으로서의 구조주의를 은연 중 들통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조주의가 그를(혹은 그의 작품을) 포섭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그의 회화 내에서 구조화 된 것이다. 구조회화와 구조주의의 이종교호(異種交互)! 사회와 존재에의 사유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는 자본주의 심화단계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존재에 대한 사회학적 판단을 여전히 유지한다. 흥미롭게도 이 명제는 존재-의식-결정이라는 세 개의 명사가 순차적으로 이어지면서 ‘존재’의 결정론에 무게를 싣는다. 존재(存在)를 ‘거기 있음’으로 풀어서 “‘거기 있음’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바꿔보자. 한 존재는 ‘거기 있음’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단순히 한 존재가 물리적 공간과 장소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흔한 말로 ‘가난의 대물림’처럼 어떤 존재는 존재의 ‘거기 있음’으로 인해 사회구성체 내의 위치가 결정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계급적이라는 것을 뜻하게 된다. 반면, “의식이 ‘거기 있음’을 결정한다.”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의식이 앞에 오면 가족․사회․국가 결정론의 구조에 투영되어 있는 ‘존재의 계급성’에 대해 존재는 스스로 저항하게 된다. 그리고 의식의 선험적이고 자기 확장적인 인식은 존재에 깃들어 있는 ‘존재자’를 깨우는 동기를 부여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함으로써 ‘의식’을 존재로부터 분리시켰다. 존재가 곧 존재자는 아니기에 ‘의식의 존재자’는 자기 존재를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이 반듯이 존재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식도 엄연히 개인의 의식과 더불어 상존하고 있잖은가! 정직성의 구조회화가 철학적 구조주의를 들통 냈던 사유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러한 ‘존재’에의 사회학적 인식이다. 그는 회화를 다시 시작하면서 존재에 대해 깊게 사유한 듯하다. 사회 내의 존재이든 세계 내의 존재이든 그가 사유한 존재는 ‘관계와 구조’ 속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이었다. 관계와 구조 내에서 개별적 주체성은 부정되었다. 개인/주체는 그들이 속한 사회와 문화적 체계 안에서 창조되는 ‘구조의 효과’에 불과했으므로. 이주로 점철된 한국사회의 삶의 단편들이 응집되면서 회화적 구조를 이루게 된 그의 ‘회화적 탄생(‘회화적 사건’이기도 할 것이다)’에는 구조의 다른 이름인 도시 재개발이 있었다. 재개발은 집이라는 구조를 완전히 트렌스폼(transform)하는 구조적 변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변이는 강력한 권력주체인 국가가 주도했고 존재자는 그래서 어찌할 수 없는 ‘사회결정론’에 포섭되었다. 정직성, 그가 도시를 걷게 되었을 때 그는 변이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존재자’가 아닌 ‘존재’의 도시구조였다. 도시를 이루는 익명의 건축적 존재들, 존재자들이 살았던 존재공간들의 구축적 형상들, ‘거기 있음’으로 의식이 결정되었던 수많은 존재들의 무정형적 형상들. 그러므로 그의 회화는(그가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구조주의(Structuralism) 사유를 내포한다. 2006년의 ‘무정형 구축’ 회화에 등장하는 전면화 된 건축들의 구조적 존재와 그 내부에 기생하며 살았던 개별 존재자들의 결정적 삶의 양태도 그러하니. 인공세계에 기생하는 자연의 구조 2006년 이후 작품들은 <신림동-연립주택>, <삼청동-주택3>, <용문동-연립주택2>, <성내동-연립주택5,6>, <거리가구-종로3가>, <한강로1가-옥상정원>의 경우처럼 실재 장소를 명기함으로써 회화적 리얼리티의 해석을 집중시켰다. 이러한 장소의 실재성은 이미지의 추상적 구조를 색채나 구도, 원근의 해체와 큐비즘적 경향과 같은 순수 미학적 해석으로만 수렴되는 것을 경계하도록 한다. 그가 ‘주거기계’라 명명했듯이 그의 인식에는 근대 이후 한국사회를 배회하고 사라졌던, 그럼에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재개발 정책에 밀리는 상태로 남아있는 생태/변종적 주거공간의 건축적이며 구축적인 미학에 대한 성찰이 깊게 배어있다. 한국사회는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집의 구조를 뜯어고쳤다.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꿨고 아궁이에서 보일러로 교체했다. 통째로 허물고 정체불명의 양옥을 권장했다. 동서양의 ‘양(洋)’을 섞은 이상한 양옥(洋屋)들이 농촌을 점거했다. 도시는 양옥을 허물고 연립주택을 세웠다. 70~80년대 도시풍경의 거개가 연립이었다. 아파트의 탄생은 강남 개발과 맞물렸다. 1990년대 초반의 수도권 신도시 개발은 아파트를 일반화 시켰다. 2000년대 뉴타운 개발은 아파트의 전면적 습격이라 할만하다. 국가 주도의 신도시, 뉴타운 정책은 20세기 한국사회를 구조주의사회학의 괴물로 만들었다. 인간의 주체성과 공동체성은 상실 당했고 인간의 주관성이나 능동성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신도시와 뉴타운의 정책적 구조만 있을 뿐이었다. ‘구조’는 폭력적이었다. 집구조의 빠른 변태(變態, metamorphosis)는 단순히 집의 구조변화라는 양태적 문제만을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낡은 것을 허물고 새 것으로 세운다.”는 ‘새마을운동’의 강제적 개발정책이, 삶을 형성했던 장소의 기억과 역사성을 깡그리 해체하고 지우는데서 시작된다. 신도시나 뉴타운 정책이 이어받은 새마을 정신은 재개발 현장에서 실체적인 공포로 다가온다. 그러한 공포감으로부터 정직성이 떠돌았던 도시들의 골목은 자연발생적으로 집들이 형성되었거나, 그 공간들이 크게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축된 연립주택들이었다. 그곳에는 인공세계와 자연세계가 공존했다. 인공세계로서의 연립주택들은 한 지역에서 우후죽순으로 혹은 순차적으로 자기가 섰던 자리에 다시 세워진 것들이었다. 터의 자연적 지세나 골격이 남아있고, 도로와 골목의 굴곡이 지속되었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집과 집 사이를 다양하게 변형시키면서 ‘공간-틈’을 인간화 했고, 그런 품새와 꼴의 비정형적 공간들에 의해 주택지는 살만한 장소로 만들어졌다. 인공세계의 주택지가 사람들의 신체적 감각본능을 수용하면서 자연세계는 기생했다. 정직성의 회화는 인공세계와 자연세계의 공존을 구조화하고 전면화했다. 그는 폭력적이며 강제적인 개발정책의 이면에서 희한하게 공존하고 있는 두 세계의 기생적 현상에 주목했다. 허물고 짓기를 반복했으나 사람살이의 휴머니즘적 공간을 이룬 주택들을 그렸다. 연립과 다세대주택들의 형식구조가 미학적 구조로 전환된 그의 회화는 그래서 근대적 구조주의의 순얼굴을 보여준다. 구조주의자들이 본질적 또는 내재적 의미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며 동시에 개개의 텍스트나 개개의 사람들이 생성시키는 의미의 연원이라는 개념을 거부했듯이 주택들은 전체적이다. 전체의 체계 안에서만 주택들은 관계를 형성하고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동일한 패턴을 가진 붉은 벽돌들, 두툼한 매스를 가진 시멘트 계단들, 단조로우나 밀집대열의 복잡계 풍경들, 허술하고 위태로운 창문들, 세대를 구분하는 창문과 기둥들, 무엇보다 벽돌과 콘크리트 매스로 극대화 된 입체적 중량감이 그렇다. 그것들의 조합이 그렇다. 그 조합의 카오스적 혼합이 그렇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카오스모스다!
자율적이며 비선형적인 회화 미학 이 사회는 한 개인을 한 가족을 한 공동체를 전체의 체계 속에서만 인식하도록 강요했다. 그의 회화는 그것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캔버스에 카오스모스로 전면화 된 집의 구조는 근대이후 구조주의를 강제적으로 끼워 맞춘 한국사회의 초상일 것이다. 그것은 해체적이나 집단적이고 무질서하나 규율적이며, 숭고한 듯하나 잔혹하고 야만적이다. 그래서 구조적이다. 그의 회화는 이미지 언어로 작동하면서 동시에 4차원의 현실로 곧장 이어진다. 2차원과 3차원, 4차원의 경계는 순간 의미를 상실한다. 회화와 현실 사이의 구분이 모호한 것. 공간의 빈 틈 하나 없이 부조적 건축물들로 가득한 2008년의 작품들은 이미지와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다. 사실의 상징이 그만큼 더 현실적이고 더 회화적인 셈이다. 그는 오랫동안 도시를 걸었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생성된 구조공간을 찾았다. 거기에도 물론 구조주의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가 찾은 생성구조로서의 개별성은 전체의 체계에 속박된 구조를 갖지 않는 것들이었다. 2010년의 개인전 “작동 Operation 作動”은 전체가 아닌 개별성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전면화 된 건축적 공간의 재현을 더 이상 전개하지 않았다. 차원에 대한 자율적 사유, 공동체의 인식, 카오스모스의 구조들, 4차원의 경계가 파고들자 그의 의식은 조금씩 존재 결정론적 생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작동’은 존재와 의식의 앞뒤를 떠나 ‘전체’를 벗어던진 개별적 기관들의 나신들이었다. 현재 그의 회화는 체계를 형성하되 개별적 현상, 기관을 이루는 오브제, 구조체들이 그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신체 없는 기관’에 해당한다. 그는 기관의 형상과 형상성으로 회화적 주제를 옮겼다. 이번 전시가 이전과 달리 구조의 자율적이며 비선형적인 선들과 색채가 자유롭게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불과 수년 사이에 구조주의를 극복해 나간 후기구조주의의 개념들처럼 ‘결정론’에 입각한 존재론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회화들은 일반적인 문장구조들과 같이 주어-목적어-동사를 순차적으로 구성하지 않는다. 각각의 개별적 언어들이 화면 안에서 놀랍도록 싱싱하게 살아 오른다. 존재, 존재자의 부재 혹은 투명성이 형성되자 의식의 완전한 자유가 획득되는 순간처럼 그의 화면은 개별적 기관들의 역능(力能)으로 충만하다. 하나의 기관은 전체에 속박됨이 없이 그 스스로 힘찬 미학적 에너지를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들뢰즈의 ‘~되기’의 개념처럼, 이주의 삶을 건축적 구조에 대입하여 몽타주하듯 새겨 넣었던 2006~2009년의 작품들에서 완전한 인식전환의 새로운 사유가 터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택들이 보여주었던 육중하고 입체적인 형상들이 사라지고 리드미컬한 선들과 색들이 화면을 비상하며 구축하고 있는 형국은 ‘거기 있음’을 더 이상 고착화 하지 않는다. 선들은 생태/변종적이며 우후죽순이고 순차적인 듯하나 자율적이다. 작가의 주관과 능동적 회화 의지는 캔버스 내에서 해방되었다. 그렇다고 회화적 디멘션(dimension)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화면은 사방으로 확산되는 효과를 창출하며, 색과 선들의 중첩에 의해 다른 맛의 깊이를 보여준다. 마치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양상을 보는 듯도 하지만 어불성설(語不成說)일뿐, 사실 그의 회화는 이전보다 훨씬 리얼리티가 강하다. 촉감적이며 시각적인, 건축적인 형상을 더 직접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그의 회화가 존재성을 얻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즉 그의 회화가 “‘거기 있음’이 미/의식을 결정한다.”는 그 존재의 결정론을.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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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등록된 덧글
오프닝 무사히 잘 끝났어..
by daradara at 03/17 네. 감사합니다. ^^ by daradara at 03/14 63빌딩에 하고 주차권 .. by daradara at 03/14 갈 수 있을까.... 이 몸.. by 혠 at 03/14 담주 금욜 오픈이야. 16일.. by daradara at 03/10 오ㅡ축하... 울집에서.. by 혠 at 03/09 ㅎㅎ 고맙다. ^^ by daradara at 01/24 뭐 영 쓸데없는 댓글이나.. by 조혜은 at 01/24 언니!!!!!!!!!!!!!!!!! 언니~!.. by 조혜은 at 01/24 혜민씨도 새해 복 많이 .. by daradara at 01/23 이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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